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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거인/소교리문답

21.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가장 복된 자리에 가장 복된 시간에 저희들을 초대해 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는 복된 길을 열어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시간 저희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일주일 동안 사는 동안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일 때문에 마음이 착잡하고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마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들음으로써 다시금 회복되어지는 복된 역사가 있게 해 주옵소서. 또는 우리자신이 행한 일때문에 가슴아파하고 슬퍼하며 눈물흘렸던 지체들이 있다면 이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들음으로서 다시금 용기를 얻고 소망을 얻고 기쁨을 얻는 시간되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시간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한번 정돈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의 몸은 이땅에 있지만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달려갈 수 있도록 복된 마음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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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가지 물어볼까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사람중에서 가장 고생 혹은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어머니.. 그 소소한 사정을 물어볼수 없지만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어머니의 고생하심을 알 수있죠.

요셉... 요셉도 상당히 고난을 당한 인물입니다.

 

근데 오늘 우리 한번 성경을 볼까요? 다같이 한번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셨어요. 그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통해서 다른 말로 말하면 고난받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히시고 높히시고 높히시고 또 높히셔서 모든 무릎으로 하여금 모든 입술로 하여금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렇게 예수님을 높히셨다. 이렇게 오늘 성경은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낮아지셨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얼마나 높이셨는가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지하실 1층에서 이제 불이나서 갇혔습니다. 그러면 그 지하 1층에 있는 사람을 구출하려면 우리가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죠? 지하 1층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만일 불속에 있는 사람이 지하 2층까지 있다면 몇층까지 가야할까요? 2층까지 내려가야합니다. 만일 불속에 갇힌 사람이 지하 3층에 있다그러면 몇층까지 가야 할까요? 그가 있는곳 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것은 어디까지 낮아지신 건가 하니깐 우리 인간이 죄를 짓고 당해야 할 맛보아야 할 그 고난과 고통과 그 형벌을 예수님께서 받으시기까지 그렇게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낮아지심을 한 3단계로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1. 사람이 되신것. - 우리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이 되신 것 자체가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1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실 뿐아니라 이 지상에서 사셨던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2번째 예수님의 낮아지심이에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3번째 단계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인간이 되시고 지상에서 33년동안에 여러가지 고난의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는가 하는 것을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 사건은 예수님 편에서 볼때는 엄청난 낮아지심입니다. 그리고 다른 말로 말하면 엄청난 고난이에요. 만일 여러분들이 지렁이가 되어라.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좋아하실분 아무도 없겠죠.. 지렁이하고 나하고는 상대가 안되죠. 지렁이는 아주 미물이고 나는 그래도 인간인데 내가 지렁이가 되라고 그러면 나를 한없이 낮추지 않으면 그렇게 안될 거에요. 너 뭐가 될래 이러면, 전 천사될래요 이럴순 있으나 저 지렁이 될래요 이런 분은 없겠죠. 지렁이는 아주 미천하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다르게 바뀔수 있다해도 나보다 뛰어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하지 나보다 한없이 모자란 그리고 미천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에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어떤 이유로 지렁이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은 그렇게 많이 낮아 진 것이 아니에요. 결국 사람이나 지렁이나 하나님 편에서 볼때는 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50보 100보 거기에서 거기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시는 일이에요.

 

본론 1.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3단계 - 1단계. 예수님의 출생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는 오늘 6절을 다시 한번 볼까요?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출생하실 때 부터 자기를 낮추셨어요. 그리고 아주 고난의 길을 접어 드셨어요. 왜냐하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어요. 예수님은 본래 성부하나님과 동등한 그런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권세와 능력과 존귀를 가지고 계시던 분이었어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이 되시기 이전에 천사들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었어요. 늘 예수님은 천군과 천사의 찬양소리와 경배가운데 영광중에 위엄가운데 찬란한 존귀함 가운데 그렇게 계시던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분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어요. 그것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것이에요. 자신을 낮추심이 없이 우리 인간이 될 수가 없으신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일 우리 인간이 되신 이 일은 하나님이셨던 그 분이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신 것이니깐 이는 마치 종의 형체를 입는 것과 같이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이 되시기 이전에 예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는 분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절이 되어도 예수님의 성탄절 사건이 그렇게 우리들에게 감동있게 감격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에요. 그런데 만일 우리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전에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본적이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에요. 아마도 천사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에요. 천사들은 제 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 께서 저 미천한 인간과 똑같은 인간의 형체를 입고 인간이 되어서 이땅에 오셨을 그때에 그들은 한없는 놀라움과 한없는 기이함으로 그들의 마음은 가득 들어 찼을 것이에요. 어찌 창조주께서 피조물 그중에서도 인간과 같이 자신을 낮출 수가 있단 말인가.

 

여러분 예전에 마지막 황제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중국 청나라에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어린아이였을때 중국 청나라 황제로 등극을 하는데 자금성에서 청나라에 문무 백관들이 쫙 도열해서 황제 즉위식을 합니다. 그때에 그 영화의 장면은 그 황제의 즉위식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카메라 앵글을 이끝에서부터 저끝까지 돌리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어요. 왜냐하면은 그 자금성에 모여있는 청나라의 문무백관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그 꼬맹이 황제이긴 하지만 그가 다스릴 그 나라의 위용을 통해서 그 소년이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지위에 있는 존재인가를 그렇게 보여주었더랬어요.

 

그런데 청나라가 망하고 나중에 그 푸이가 일개 아주 미천한 정원사로 나중에 전락을 하게 되요. 그게 대조가 되는 것이에요. 초기에 청나라 황제로서 누리던 그의 지위와 말년에 쓸쓸하게 한 정원사로서 그렇게 인생을 마감한 그 인생의 대조를 그렇게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태어날때 부터 정원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정원사로 자라다가 그리 죽었으면 별로 그렇게 차이가 안났을텐데 원래는 청나라 당대 최고의 그런 나라의 이 황제였다가 뚝떨어져서 그렇게 이 일개 미천한 정원사가 된 그 인생은 극명하게 대조를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본디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별 문제가 안되고 또 오히려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 볼 때는 월등하게 자랑스럽죠. 우리가 저런 미천한 바퀴벌레도 아니고 지렁이도 아니고 산토끼도 아니고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무한한 영광이 될 수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으로 이렇게 완전히 자신을 낮추신 것은 엄청나게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다.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출생부터 예수님은 한없이 자기를 낮추신 분이시다. 하는 사실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 미천한 출생환경.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인간이 되셔서 온다고 쳐도 그렇다면 이왕이면 당대에 가장 강대국이었던 로마시대에 태어났으니깐 로마제국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 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출생환경 조차도 로마 제국이 아니라 그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한 조그마한 변방에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났어요. 여러분 한사람이 출생할때 당대를 세계를 호령하는 그런 강대국으로 태어난다는 것과 한 변방의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다르죠.

 

예를 들어 오늘 미국 시민으로 태어나는 것과 서열상으로 볼때 미천한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이 느낌이 다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출생지 조차도 식민지의 한 백성으로 태어났어요. 식민지 백성가운데서 그 당시 유대땅에는 큰 도시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은 어디였습니까? 유대땅에 베들레헴이었어요. 당시 베들레헴은 작고 보잘 것이 없는 그런 마을이었어요. 당대에 그래도 예루살렘 처럼 큰 대도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름도 별로 없는 아주 작은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서 출생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때도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집에서 보통 출생을 하게 마련이죠. 여러분들도 요즘에 좋은 병원에서 태어나시거나 집에서 태어났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는 그러한 집에서 태어나지 못하시고 성경에 보니깐, 옛날 이스라엘에는 여관이 있었는데 그 여관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일 뿐 아니라 또 여관 한 구석에는 그들이 타고온 짐승들을 함께 먹여주는 그런 곳이 있어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자동차 여행을 할때 방은 사람이 자고 자동차는 어디에 넣습니까? 주차장에 넣듯이 옛날에 짐승들을 데리고 여행을 하다가 사람들이 사는 곳과 또 짐승들이 들어가는 짐승들을 먹이고 짐승들을 재우는 그런 곳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때 바로 그때에 사람들이 많아서 방이 없어서 정상적으로 사람이 사는 그런 집도 아니고 방도 아니고 바로 짐승들이 먹고 자고 하는 짐승의 마굿간에서 그렇게 태어나신 것이에요.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그곳을 통해서 그렇게 출생을 하였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실때 조차도 가장 비참한 나라에 가장 비천한 마을에 가장 사람도 살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조차 없는 그 짐승들이 먹고 자는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그런 구유통에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땅에 태어나신 것은 그가 얼마나 출생할때 자기를 낮추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 나는 참 비참한 환경에서 태어났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이자리에 있는 여러분 보다 월등하게 비참한 환경에서 이땅에 태어나셨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론 2. 예수님의 낮아지심 3단계 - 2단계. 지상생활.

 

- 예수님의 사생애 기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신 것은 33년동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예수님의 삶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삶이에요. 다시 말하면 한없이 고생과 고난을 겪었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자랐습니까? 예수님께서 자란 마을은 바로 북쪽 갈릴리에 있는 나사렛이라 하는 동네에서 예수님은 이제 성장을 하게 됩니다. 약 30년동안에 예수님은 거기서 사셨어요. 그런데 이 나사렛하면은 그야말로 오늘날로 말하면 깡촌이에요. 아주 시골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메시야가 어디서 났느냐 할때 예수님께서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니깐, 아주 웃었어요. 어떻게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가 있느냐? 이렇게 말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30년동안 이 사생애를 산 그 삶도 아주 이름없는 미천한 지역에서 사셨던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누군가 제게 고향이 어딘가 물어보면 저는 김천이라고 그렇게 말해요. 사실은 김천이 아니고 약간떨어진 농소라는 곳이 있는데 제가 농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농소 어디입니까? 이렇게 자꾸 물어봐서 귀찮아가지고 이제좀 그래도 좀 큰데 이름을 대가지고 김천이라고 말합니다. 김천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김천이 어딥니까? 하면 대구 위에 한시간 거리라고 대구 이름을 댑니다. 농사짓는땅 농소, 깡촌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게 사실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제가 선을 볼때도 한 여인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니깐, 전주 출신이래요. 오 그럼 전주 비빔밥 잘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깐, 이상한 삼내라는 동네에서 살았더라구요. 아니 삼순이가 태어나 자란 동네 삼내 그러니깐 너무 어디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주변에 있는 큰 도시를 대가지고 자기 이미지 메이킹을 한거죠. 사실은 삼내 출신이면 누가 거들떠 보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전주 출신이라 하니깐 그래도 또..

 

예수님께서 태어날때 예루살렘 출신 입니다.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그럼 왕도잖아요. 왕도에서 그렇게 태어나시고 자라시고 뭔가 있을 거 같은데 예수님께서 자라나신곳이 30년 동안 그냥 무명의 이름 없는 촌에서 그렇게 자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난 그 가정 자체가 아주 가난한 집이었어요. 왜 가난한지 알수 있는가 하니간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가 이 직업이 목수였다고 그래요. 목수는 그당시에도 그렇게 좀 경제적으로 부자 직업은 아니죠. 아주 서민중에서도 가난한 계층을 형성하는 그런 직업이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태어났을때 8일째만에 부모들이 제물을 바쳤는데 그 때 원래는 정상적이면은 양을 제물로 바쳐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들은 비둘기로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것은 레위기에 보게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양대신에 뭘 바칠수가 있어요? 비둘기를 바칠수가 있어요. 그것으로 봐서 예수님의 부모는 아주 가난한 계층이었음을 알 수가 있고, 예수님께서 30년동안에 그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신 것이에요.

 

그러니 자연히 예수님께서도 30년동안에는 무슨 일을 하셨을 까요? 원래 요셉이가 했던 그런 목수의 일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30년동안 육체 노동자로서 생활을 하셨어요. 육체노동자로서 땀을 흘리면서 수고하면서 손마디가 굳어질 정도로 그렇게 이 세상에서 직업을 선택할 때 우리가 당연히 직업을 선택하라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화이트 칼라를 선호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덜 힘드니까 그런 직업을 선호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당시에도 그런 직책이 있었지만은 예수님은 30년 동안에 육체적으로 무척 고단한 그런 노동자로서의 삶을 사시고 가난한 삶을 사셨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 예수님의 공생애 고난

 

예수님께서 30년이 지나고 이제 드디어 메시아로서 약 3년간 혹은 3년반정도의 공생애를 출발하실 그때에 예수님은 어떤삶을 사셨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동안에 이제 집없는 사람을 요즘 뭐라고 그러죠? 홈리스라고 그래요. 예수님은 3년 반정도 홈리스생활을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3년 반동안 홈리스 생활을 하셨어요. 영어로 쓰니깐 좀 고생해 보이죠. 거지생활이에요. 집이없으니깐,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3년 반동안 이마을에서 저마을로 이집에서 저집으로 예수님은 3년 반동안 정처 없이 늘 일정하게 자신이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그런 집이 없이 그렇게 이마을로 저마을로 다니시면서 그렇게 사셨어요. 집없이 홈리스처럼 그렇게 사셨어요. 물론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 삶을 선택하신 것인데 그러나 그분의 삶은 아무런 재산도 가지지 아니한 채로 3년 반을 집없이 그렇게 삶을 사셨다.

 

그래서 한번 이렇게 말씀해준 적이 있어요. 한 사람이 예수님께 예수님 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요청을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신 적이 있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나는 머리둘곳이 없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집없이 그렇게 3년 반의 생활을 사신 겁니다.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그게 크건 작건 별게 문제고 아주 감사한 일이에요.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했는데 이제 저녁이 되서 날씨가 컴컴해졋는데 돌아갈 집이 없다. 홈리스거든요. 그러면 얼마나 그 삶이 고단하겠어요.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3년 씩이나 집없이 그렇게 떠도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극심한 고난을 예상할 수 있겠죠. 예수님께서 3년반의 생활은 다른 여인들이 헌금 해가지고 그렇게 주시는 것을 먹으신 것이고 다른 마을에 전도하시다가 먹을 것을 주면 먹으시는 것이고 잘 곳을 주면 주무시는 것이고 그것이 없으면 하늘을 지붕삼아 그렇게 예수님은 사신 것이에요.

 

예수님의 공생애에 삶 자체가 무척 고단한 그런 삶이 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한사람이 육체로서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그런 배고픔을 겪어 보신 분이에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40일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40일을 금식한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극한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우리중에 아마 대다수는 그런 40일 금식을 해본적이 없죠. 많이 해봐야 뭐 일주일 일주일 하니깐 눈이 들어가고 정신이 없고 그러니깐 이렇게 까지 안가도 보통 많은 사람들은 한끼만 해도 그냥 눈이 조금씩 들어가고 하루정도만 굶어도 정신이 없어지죠. 정신이 몽롱해가지고 생각나지 않죠. 사실 인간이 견디기 가장 힘든것이 이 배고픔인데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시면서 인간의 육체 고통의 극한을 그렇게 경험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너무나 바쁘셨기 때문에 때로는 식사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사셨어요. 우리가 생각할때 옛날 휴가 보내는것 같은 맨날 휴가철 같은 그런 삶을 보낸사람이 몇이 되겠어요. 물론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부분 바쁜데 늘 너무너무 바빠 하지만 사실은 공생애 3년 동안에 예수님처럼 그렇게 분주하고 바쁘게 사신분이 어딨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가는 곳 마다 예수님 몸이라도 만져볼려고 예수님 옷이라도 만져 볼려고 밀려드는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예수님은 그렇게 식사할 겨를 도 없이 사역하시는 그분의 고단한 삶을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볼 수 있어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셨는데 갑자기 갈릴리 바다에 폭풍이 불어가지고 배가 뒤집을 정도가 됬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혼비 백산되가지고 거의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그렇게 파도가 일고 바람이 부는 그런 현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안에서 아주 깊은 잠을 자고 계셨어요. 물론 영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깐 폭풍이야 불던 파도가 일건 잘 수 있겠지만 또 육체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단한 사역으로 지치셨으면 그렇게 파도가 일고 바람이 부는 그런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그런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잠에 골아 떨어질 정도로 그렇게 얼마나 피곤하시면 배에서 깊은 잠을 주무실 수 가 있을까..

 

여러분 우리가 그냥 앉자마자 눕자마자 깊은 잠에 골아 떨어져가지고 옆에서 폭탄이 터지건 뭐가 나던지 간에 모르고 잔다고 하면  그전에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야 그렇게 눕자마자 천길 낭떠러지 같은 잠속으로 빠져들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는 그런 날들간의 하루하루 연속으로 그렇게 삶을 사신 것입니다.

 

- 주변사람들의 몰이해와 제자들의 배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몰 이해를 당했어요. 인정받지를 못했어요. 예수님은 가장 먼저 가족들로 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대 메시아신대 가족들은 인정을 안해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3년 공생애를 하실때 전도를 하시고 설교를 할때 그 형제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어요. 아니 우리 형이 이상하게 된 거 아닌가, 자신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처럼 생각해서 그렇게 전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자신의 가족들로 부터 예수님께서는 외면을 당했어요. 가족들이 이해를 못해줬어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답답한 일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 할 수 있으나, 가장 얼굴을 맞대고 가까이 있는 가족들이 남편이 아내가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리고 자식들이 형제들이 나를 몰라주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외면한다면 그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의 삶은 가족들로 부터 외면당하는 그와 같은 삶을 사셨어요. 나중에 부활한 이후에야 예수님의 그런 동생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지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을 철저히 오해했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에 가서 설교를 하셨는데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겨야 되는데 타지 사람들은 뭐라해도 자기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이 성공했다고 해서 반겨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마을 사람들이 너희 집안이 어디냐 너는 요셉 아들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급기야 예수님을 동네 낭떠러지에 가서 떨어뜨리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렇게 고향 사람들로 부터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거 있잖아요. 다른 집안에서는 이 정치가들이 말이죠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이상하게 그 고향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그를 받들고 해가지고  다른 동네 사람들은 다 손가락질 하는데 고향사람들만 감싸안아가지고 그냥 우리사람이라고 해가지고 나중에 뭐라도 떨어질까봐 그게 보통 인지상정인데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배척당하고 심지어 고향사람들로부터도 죽임을 당하려고 하셨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역하실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하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자주하자 예수님은 그냥 먹기를 탐하는 죄인들의 친구라고 그렇게 손가락질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예수님도 미쳤다고 그랬어요. 너는 미쳤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보고 귀신들렸다고 그랬어요. 너는 귀신 들렸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통 욕이 아니라 그냥 정신나간 사람 미친 사람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조롱과 많은 멸시와 따돌림을 그렇게 받으셨어요. 심지어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살해위협을 당하셨어요. 예수님은 수차례 다른사람들로 부터 죽을 위험에 빠질 그런 경험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생애에 마지막에 특별히 자신의 제자가운데 한사람에게 팔렸어요. 배신을 당한 거죠. 가롯유다가 은 30냥에 스승을 팔아 먹었어요.

 

이런 제자로부터 팔림을 당하는 그와같은 큰 배신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하나의 제자인 베드로로부터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저주하는 그처럼 베드로로 부터도 예수님께서는 그와같이 또한 배반을 당하셨어요. 이 가롯유다와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을 치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로부터는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음을 당했어요. 이렇게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이렇게 버림받고 배신당하고 또한 그렇게 버려둠을 당하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육체가 힘든것은 그래도 좀 쉬거나 하면 유지될 수가 있는데 회복될 수가 있는데 사실 견디기 힘든것은 욕먹는 거죠. 다른 사람들로 부터 왕따 당하고 다른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조롱받는 것은 참기 힘들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늘 시험 받고 조롱 받고 비난 받고 이와같이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 부터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로 부터 자신의 제자들로 부터도 그렇게 배신을 당하는 이런 고난을 겪으셨다. 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고난 받으신 2단계입니다.

 

본론3. 예수님의 낮아지심 3단계 - 3단계. 십자가에서의 죽음.

 

- 가장 잔혹한 십자가 형벌.

 

그러면 예수님의 이 낮아지심은 여기에서 그치질 않았어요.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마지막 단계는 뭐하신 거죠?

십자가에서 죽으신것, 그것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의 고난에 절정이에요. 고난의 극치에요. 우리가 보통 죽을 때에 사실은 잘 죽기를 원하죠. 잘태어나기를 원하지만 잘 죽기도 원해요. 잘 죽는 다는 것은 뭘말할까요? 고통 없이 죽는 것인데 고통없이 죽는 것은 나이가 많아가지고 한 백살 120살 이렇게 살다가 어느날 잠잘때 기운이 딸려서 숨을 끊으면 자다가 죽으면 그게 최고로 사실은 우리가 선망하는 그런 죽음이잖아요. 아무런 고통 없이 잠자면서도 죽는다. 이건 굉장한 희망사항이죠.

 

그러나 우리가 그보다 못한 것은 좀 병이 걸려서 죽기도 하고, 사고가 나서 죽기도 하는데 이보다 더 비참한 삶이 있다면 죄인으로 체포되가지고 사형을 당하는 죽음은 사실좀 끔찍한 죽음이잖아요. 사형을 당하는 것,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로서 잘못된 재판으로 인해서 죄인으로 취급받아서 그렇게 죽으셨는데 이렇게 죄를 지어서 사형을 당하더라도 사람들이 좀더 사형수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주기 위해서는 사형의 방법을 좀 빨리 고통없이 죽는 죽음을 선택하면 그 죄수를 배려해주는 겁니다. 같은 사형을 하더라도. 그게이제 고대에는 어떻게 사형을 하는 것인가 하니깐, 단두대 칼로써 그렇게 목을 댕강 이렇게 쳐서 사형을 시키면 겁이야 나겠죠.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는 겁이야 나겠지만은 내리치면 순간적으로 죽으니깐 그 고통이 그렇게 크지 않고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맛보다가 죽기 때문에 참수형은 비교적 신사적인 그런 사형 방법이에요. 그런데 같은 죄인을 사형을 하더라도 화형을 시킨다. 끔찍하잖아요. 한사람의 몸이 타들어가는 시간동안에 그게 3시간이건 5시간이건 그렇게 온 몸이 타들어가는 동안에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이왕 죄인으로서 사형수로 취급하더라도 이건 좀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사형 방법일 것이에요.

 

그래서 사형수들이 물어보면 이왕이면 참수형을 당할 것이고 요즘에는 총살형이나, 전기의자에서 죽는 죽음을 원할 것이지 그렇게 화형당해 죽기를 원치는 않을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 십자가의 형은 화형당하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사형방식이에요. 고대인들이 개발해낸 사형방법 중에서 이 십자가형은 죄수를 가장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하면서 죽일수 있는 방법으로 개발한 방법이 이 십자가 처형방법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십자가 처형 방법은 한 죄수를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기 전까지 우리가 옛날 영화나 이런걸 보게 되면 미리 채찍을 때려요. 매질을 하는데 그 회초리에 한 39에 파편에 갈고리가 있어가지고 그 쇠 갈고리가 이 등을 치게되면은 거기서 살점들이 뜯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매질을 통해서 거의 죄수가 반죽을 때까지 매질을 해가지고 살점들이 파일정도로 그렇게 한다음에 사형장으로 끌고가서 십자가에 매답니다.

 

십자가에 매다는데 그냥 양손과 발에 못으로 박아서 지탱시키기 때문에 온몸이 그 박아놓은 못에 의해서 지탱을 해야 되니깐 사실은 몸이 깨진거죠. 몸이 찢어진 것이에요. 그 찢어진 그 사이로 피가 흘러 나오고 물이 흘러나와서 그 물과 피가 다 빠져나와서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고문을 받아가면서 죽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가장 인간이 죽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스러운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이에요. 그래서 보통 죄수들이 한 오래 매달린 사람은 3일씩도 매달려 있었다고 그러는데 그야말로 찢을 뜻한 바늘 하나만 찔러도 아픈데 온 몸이 그렇게 손과 발이 못으로 찔린 상태에서 그와같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온 몸에 모든 피가다 쏟아질때 까지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리는 죽음은 한 인간이 가장 고통을 길게 느끼면서 육체적으로 가장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이땅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일 뿐아니라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죽음이에요. 만일 우리가 그런 고통을 받더라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렇게 죽임을 당한다 그러면 부끄럽진 않겠죠. 그런데 십자가의 이 처형 방법은 공개 처형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다 보면서 욕하고 저주하는 가운데서 그 욕을 들어가면서 저주를 받으면서 그렇게 죽어가는 수치스러운 죽음이에요. 그뿐아니라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는 옷을 다 벗기고 나체로다가 벌거 벗겨가지고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에요. 사람들이 가장 수치를 느낄때가 다른 사람앞에서 이 벌거 벗는 거잖아요. 거기다가 벌거 벗은 상태에서 그렇게 죽을 때 예수님께서보면 지나가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욕합니다.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지. 꼴좋다. 하면서 또 다른 일반사람들도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당장 너를 내려오게해서 너를 구해보라 하면서 비웃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처형하던 십자가의 군병들 로마의 군인들 조차도 예수님을 조롱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다른 사형수까지도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온 천지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친 상태에서 예수님의 적들로 우글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손가락질하고 침뱉고 하는 가운데 벌것벗은 수치를 드러내시면서 그렇게 죽으셨어요.

 

- 하나님의 진노의 잔_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 이처럼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수치스러울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죽음이에요. 저주를 받은 죽음이에요. 우리가 신명기 21장 23절을 보게되면 '나무에 달려 죽는 자 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니라' 율법은 그렇게 규정하고 있어요.

 

여러분 그냥 사고로 죽었다. 나이가 많아서 죽었다. 병으로 죽었다. 이게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죽음이 나무에 달려죽은 죽음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죽음은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때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죽음이에요. 여러분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의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다른 사람들로 부터의 부끄러움을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지옥의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담당하셨던 시간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이에요.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우리가 지옥에서 맛보아야할 그 고통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를 잘 이해를 못해요. 예수님께서 내일 십자가를 앞두시고 기도하시는데 얼마나 예수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이 땀이 흐르는데 이 땀이 핏방울 처럼 뚝뚝 떨어졌어요. 우리가 피는 몽골몽골하게 떨어지잖아요. 근데 이땀이 떨어지는데 핏방울처럼 떨어질 정도로 몸속에서 진액이 짜였다는 것이죠. 왜 예수님께서 몸에 진액이 짜일 정도로 그렇게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는가 하니깐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면 알 수 있어요. '아버지 만일 아버지께서 할 수 만있으시다면 이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요. 이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요. 내가 이잔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면 내가 이잔을 마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두려워 번민하며 떠셨어요. 아니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앞두고 그렇게 두려워하고 번민하고 두려워 떠시는 그와 같은 행동을 보이셨을까요? 우리가 역사상에 보게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죽을 때에 담대하게 죽는 사람들을 보게되요. 소크라테스도 독극물을 마실때 그렇게 두려워 떨면서 마셨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아요. 그냥 그렇게 늠름하게 마시다 갔죠. 우리가 볼때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해요. 예수님의 제자인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사실 아프긴 아팠겠지만은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 괴로워가지고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그렇게 죽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아요. 오히려 돌에 맞으면서도 스데반의 얼굴이 해와같이 천사와같이 빛나면서 그렇게 스데반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성경은 기록해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용감하게 당당하게 그렇게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죽으시지 않고 번민하고 두려워하고 떨면서 온몸에서 핏방울 떨어지듯이 땀이나는 정도로 두려운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의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신 것일까요?

 

여러분, 그 예수님께서 받아 마셔야될 잔이라는 것이 무슨 잔인가 하면 육체의 고통이 아니에요. 손발이 못에 찔리고 병정에 의해서 옆구리가 창으로 찔리는 육체의 고통이 아니에요. 또한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고 욕하고 침뱉는 그와 같은 사람들로 부터 당하는 정신적인 수치와 정신적인 고난이 아니에요. 바로 이 잔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들을 향해서 거룩한 공의와 거룩한 공의를 퍼 붓는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잔이에요.

 

다시 말하면 지옥의 들어가서 죄인들이 받아야될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의 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맛보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인간중에서는 그 깊이를 헤아릴수 없는 그런 고난이었어요. 아무도 이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죄인으로서 지옥에 들어가서 고통을 겪어야될 그 지옥의 고통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세상에서는 그런 고통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지옥의 고통이 어떠한 건지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대해서 두려워 떨었던 것이에요.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바로 지옥에서 예수님이 두려워 떨었던 그 저주와 형벌을 본인이 직접 맛볼 것이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값으로 우리가 영원히 지옥에서 받았어야 할 그 영원한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몸담아 그렇게 그 심판을 다 받으신 것이에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자기를 낮추신 것입니다.

 

본론 4.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우리의 삶.

 

여러분은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할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따르니깐,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이 참 영광 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33년간에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를 낮추고 또 낮추고 또 낮추는 삶이었습니다.

 

고난 받으시고 또 고난받으시고 또 고난 받으신 삶이었어요. 왜일까요?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난의 생애를 자신을 낮추는 생애를 사셨을까요? 그것은 낮고 비천한 낮고 죄악가운데 있는 우리를 건지실려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낮추신 것이에요. 우리 구원 받아야 될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간 까지 낮추셨어요. 우리 죄인들이 지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죄값으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대신에 지상의  고난을 겪었어요. 예수님께서는 장차 죄인된 우리가 지옥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대신에 지옥의 쓴잔을 지옥의 저주를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기까지 그래서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낮추고 자신을 고난 속에 그렇게 놓아두게 되신 것이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에요. 우리를 높이시기 위한 것이에요. 우리를 장차 하나님의 아들처럼 우리를 장차 하나님과 왕노릇 할 자로 그렇게 우리를 높이고 높이고 또 높이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시게 된 것이에요.

 

장차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고 영광을 주시고 또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은 고난을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또 고난을 받으신 것이에요. 그것은 우리에게 영광과 우리에게 높임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대신에 우리가 받아야 될 그 낮아짐과 고난과 저주를 예수님께서는 받으셨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제가 정태형제한테 다시 묻습니다. 이세상에 가장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받으신 분은 누구세요? 예수님이라고 하네요. 어머니의 고통은 크셨겠지만 어머니 고통은 예수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네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여러분이 지금까지 사시면서 나는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너무 비참하게 자랐어. 내 고향은 이름이 없어가지고 내가 어디서 왔다고 하면 '뭐 어디? 어디?'이렇게 물어보는 아주 그런 미천한 지역에서 성장했을 지도 모르겠어요. 또 여러분들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따돌림 당하고 몰이해당하고 외면당하는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여러분이 지금도 굉장한 가난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여러분들이 육체의 질병때문에 굉장한 육체의 고통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세상에서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치의 고통 고통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예수님께서 다 겪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대부분 여러분이 잘못해서 당한 고통이 대부분일 것이에요. 여러분이 질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대개 여러분의 생활 습관이 잘못됬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에요. 또 여러분이 다른 사람으로 부터 따돌림 당하거나 외면을 당해도 여러분의 잘못된 성격때문에 여러분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따돌림 당하거나 혹은 또 그렇게 외면을 당하는 수가 있을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 없으신 분이 아무런 잘못이 없으신 분이 그러한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잘못때문에 그렇게 당한 고난에 대해서는 사실은 나는 이런 고난은 받아도 마땅하다 그래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 고난이 마땅하지가 않아요. 고난 당할 필요가 없어요. 고난 당해서는 안되는 분이에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 바로 그이유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이에요. 다른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시려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은 대신 받지 않아도 될 고난을 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이에요.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살리고 다른 사람을 부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주실려고 예수님은 대신 그와 같은 육체적인 정신적인 사회적인 영적인 모든 고난을 짊어지신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에 여러분이 잘 못한 것이 명백히 없는데도 여러분이 예수님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혹시 가족들에게 욕먹은 적이 있습니까? 명백히 여러분이 잘못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학교에서 예수님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믿지 않는 친구들로 부터 그렇게 왕따 당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여러분이 군대에 있는 다른 동기들로 부터 상관들로 부터 불이익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명백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직장에서 예수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믿는 사람답게 착하게 살려고 한 이유 때문에 냉대를 당한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바로 예수님이 그 이유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여러분이 그렇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애도 불구하고 주변사람들로 부터 그렇게 때로는 냉대와 질시와 멸시와 조롱을 받고 있다면 그는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더잘 이해 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에요. 그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 할 수 있는 그런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중에 하나는 이와같이 많은 사람들로 부터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음애도 불구하고 무고한 그와같은 비난과 고난과 채찍질을 당할때에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옛날에 프란시스라는 사람은 그랬다고 그러죠. 심지어 자기가 가난하게 살았지만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어서 자기 몸속에서도 피가 흐르는 성흔을 달라고 했다고 그러는데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살다보면 성실하게 살다보면 우리의 주변환경으로 부터 주변 사람들로 부터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내가 동참하는 것으로 인해서 나도 이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한 지경으로 내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고난으로 인해서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수 있는 그런 계기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 전도의 현장에서.

 

여러분, 또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이 고난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기쁜마음으로 그렇게 치르신 댓가이고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이땅을 살면서 우리가 치루어야 될 많은 일들 가운데서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고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라면 기꺼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그렇게 주님의 길을 따라갈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고난을 자초할 수는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놀러 가는데 자기는 놀러가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한다. 물론 고난은 고난이죠.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자기가 시험에 합격해서 누릴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자기를 위해서 고난을 취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그 고난은 그 결과가 자기 유익을 주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에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그런 고난이 아니에요. 주님을 닮는 고난은 바로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희생하는 그런 고난이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복된 고난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땅을 살면서 고난을 당하는 가장 중요한 것중에 하나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며 당하는 고난은 뭐겠습니까? 그것은 전도할 때 드러나요.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를 지신것도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고난 당하신 것처럼 우리가 만일 다른 한사람을 전도하려고 하면 그때부터 사실 고난이 시작됩니다. 사장님이 자기 직원을 전도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해보세요. 그전까지는 잘못하면 단칼에 혼낼수도 있는데 저 친구를 전도하려고 마음먹은 부터는 혼내고 싶어도 좀 조심스럽게 될 것이에요. 내가 나중에 친구를 전도해야 되는데 나의 행동중에서 혹시라도 저친구의 마음에 안드는 행동이 있으면 복음 전하는데 걸림돌이 되니깐 내가 사장인데 오히려 그 직원의 종처럼 그렇게 그의 비위를 맞춰 줄려고 그의 눈치를 보고 될수있는대로 잘해주고 하면서 그의 수준으로 자기를 낮출 수 밖에 없지 않아요??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전도하려고 하면 그 사람의 수준으로 우리를 낮추게 되겠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우리형제들 중에서 자매들 중에서 인도네시아에 10여명이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사실 그 지역은 우리가 사는 것처럼 환경이 우리 처럼 좋지는 않아요. 물도 우리나라 처럼 좋지는 않아요. 기후도 마찬가지에요. 음식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그들이 기꺼이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에 육체적으로는 굉장히 힘든 그런 곳에 자기를 던졌어요. 그건 왜그런가 하니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또 이제 이번 토요일부터 한 일주일 정도 몽골이라는 곳에 가서 20여명이 또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곳도 우리나라와 같이 환경이 좋은 곳이 아니죠. 거기도 열악한 환경속에들어가게 될 것이에요. 텐트치고 사는 사람들속에 들어가서 함께 자고 함께 먹고 그렇게 할 것이에요.

 

자신의 시간을 일주일동안 허비하는 것이고 자신의 육체를 고단한 여행길에 내어 맡기는 것이고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느끼는 문화적인 충격속에 자기를 내어 맡겨야 하는 것이에요. 이와같은 것은 왜그렇게 하는 가 하니깐 한사람으로도 혹시 나의 이 선교여행을 통해서 구원 받는 사람들이 생길까 하여 우리가 자발적으로 고난을 그렇게 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전도를 하거나 선교를 하는 행위는 우리 자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죠. 다시말하면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자신이 그들을 복음전하기 위해서 치르는 그와같은 많은 댓가 그런 희생은 주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가 사는 지역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먹으시고 우리와 똑같이 주무시고, 우리와 똑같이 그렇게 고난을 받으시면서 심지어 우리보다도 더 심한 고난을 대신 떠맡으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전도하며 선교하는데 들어가는 댓가를 그렇게 아까워 하지 마세요. 전도하거나 선교하는데 들어가는 여러분의 희생을 값지게 생각하세요. 그 값진 희생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그런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으로 가지 않는다 할 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갈때 물질로 그렇게 그들을 후원하는 것도 역시 자발적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에요. 내가 가진 이 물질을 나를 위해 쓰지 않고 선교지에 사람들을 위해 헌금을 한다. 선교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금을 한다 그또한 자발적인 이 헌신 자발적인 희생. 자발적인 댓가지불의 중요한 방편이 될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팀들이 떠날 때도 보통 선교여행 경비가 100만원 정도해서 그렇게 떠납니다. 물론 어찌 생각하면 우리가 여행이기도 하죠. 다른 나라가서 숙박을 하는 것이니깐, 좋기도 한 것이지만 원래 선교여행은 관광여행은 아니에요. 그렇게 때문에 쉬면서 맛있는거 먹으면서 즐기면서 하는 그런 관광 여행 신혼 여행 아니에요. 일주일동안 죽을 고생하면서 그렇게 선교지 사람 만나고 오는 일이니깐, 그들이 그렇게 자신의 돈을 들여서 시간을 들여서 가는 것 자체는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우리대신에 십자가를 진 것과 작은 주님의 뒤를 따르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 중에서 나도 우리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거나 먼곳에 있는 사람들을 선교하는데 직접 나가고 싶지만은 시간이 없는 분들도 있죠. 그런 분들은 사실 나가는 분들을 위해서 십시일반으로 선교후원 헌금을 보내주는 것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나라에 동참하는 중요한 방법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전에 인도네시아에 갔다온 분들이 자발적으로 이번에도 보니깐 이번에가는 후배 선교여행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후원 헌금을 해주어서 많은 부분 선교헌금이 충당되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사실은 우리가 전도하지 않고 선교하는데 보내는 시간과 물질이 아니라면 우리가 예수믿는 다고 고난 받을 것이 뭐가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주일날 이렇게 교회가는데 성경책 들은 사람은 중간에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고 한다면 상당히 예배드리러 가는 것 자체도 고난이라고 하겠지만 우리가 지하철에서 아무리 성경책 들고 다녀도 좀 보기 싫다고는 그러겠지만은 그것가지고 우리를 감옥에 가두는 것도 없고 그리고 우리가 길거리에서 마음껏 전도해도 좀 조용히 하라고는 하겠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의 이와같은 낮아지심에 동참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전도하거나 선교할 때 주님이 당하신 이 낮아짐 이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다른 한사람의 영혼을 더 살찌우기 위해서 그의 영혼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해 내시간을 들이고 그를 위해 내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 또한 주님의 자발적인 낮춤에 동참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교회에서 봉사하고 수고하는 모든 것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일들도 주님의 낮아지심에 자신을 동참 시키는 그런 중요한 비결이라 생각을 합니다.

 

결론.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낮아지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사람이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지상의 고난에 찬 삶을 사셨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복종하시면서 자신을 낮추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우리릉 위해서 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주기 위해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자신을 고난 가운데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을 따른 우리도 나자신을 위해서 내 잘못들을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우리의 시간이나 우리의 물질이나 우리의 재능이나 할 수있다면 우리의 목숨이라도  그들을 위해서 쏟아붙는 이 일이야 말로 낮아지신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음주에 보여주겠지만 그를 지극히 높히신 것처럼 바로 주님의 낮아지심 주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혀 주시는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낮아지심과 주님의 높아지심을 함께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27. 그리스도는 어떻게 낮아지셨습니까?

답27.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태어나, 비천한 환경에서 자라며, 율법에 복종하고, 세상의 온갖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고, 무덤에 묻히며, 잠시동안 죽음의 세력아래 계심으로 낮아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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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조그만한 두려움만 생겨도 조그만한 육체의 고통만 있어도 비명을 지르면서 못살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때로 하나님을 불평하기도 한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고난 받으실 이유가 없음애도 불구하고 낮아져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살리시려고 우리에게 복주시려고 우리를 잘되게 해주시려고 자발적으로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시고 고난 받으시고 또 고난 받으신 사실을 저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 올때마다 주님의 낮아지심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해 주셔서 주님의 고난에 비하면 우리의 고난이 있다할 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오히려 너무 안일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 하게 해주시고 주님처럼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우리의 생명을 쏟아붙기를 즐겨할 수 있는 성숙한 저희로 변화 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그래서 우리가 이땅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만나는 곳마다 우리가 있는 곳마다 주님의 자발적인 낮아짐과 고난받으심을 본받아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살맛나게 하는데 저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