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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거인/소교리문답

22.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하나님 아버지 이시간 저희들의 눈을 들어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성령님을 저희가운데 충만히 허락해 주셔서 우리의 마음의 눈, 믿음의 눈, 영혼의 눈을 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우리 주님의 영광과 존귀와 위엄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를 기뻐하며 사랑하며 즐거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다시 한번 주장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낮고 비천한 땅에 아직도 저희가 머물고 있지만 우리의 머리와 우리의 가슴과 우리의 마음은 보좌에 계신 주님을 향함으로 우리의 심령이 구원되어서 영원한 나라에 시민처럼 영원한 나라의 백성처럼 그렇게 이땅에 살아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다시 한번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시간도 기록된 말씀과 성령님을 부어서 하나님과 저희에 생각이 더욱더 가까워 질 수 있는 복을 얻게 해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많이 이해 하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달려 갈 수 있는 복된 아침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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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또는 형체또는 보류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서론

 

오늘 읽은 이 성경말씀을 보게되면 예수님 께서는 본래 이 세상에 오시기전에 약 2천년전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땅에 오시기도 전에 영원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성령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하늘을 떠나서 이땅에 오셨어요. 우리 인간과 동일하게 되셨고, 우리 인간처럼 동일하게 고난을 받으셨고, 또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지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신 것이죠.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낮아지신 것이에요.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의 죽으신것으로 끝이 아니라 오늘 성경 말씀을 보니깐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고 높이시고 높이시고 또 높혀주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높아지셨어요. 우리한번 9절 부터 11절 까지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통해서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단계는 성경전체를 보게 되면 조금 더 우리가 4가지 단계로 그렇게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겠어요.

 

--예수님의 높아지심의 4단계

 

 예수님이 높아지신 1단계는 부활 하신 일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 더 높아지신 단계는 뭘까요?

2단계는 승천하신 것 하늘로 승천하신 것

그리고 더 높아지신 3단계는 뭘까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

더 높아지신 마지막 단계는 뭘까요? 다시 오셔서 온세상을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공부하려고 하는 소교리 문답은 이 내용을 신앙고백으로 하는 것입니다.

 

28문. 그리스도는 어떻게 높아지셨습니까?

28답.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사흘만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하늘로 올라가신 것과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과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단계는 처음 부활하시고 그다음에 승천하시고 그다음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그리고 심판하시러 재림 하시는 단계를 예수님의 높아지심이라 이렇게 부릅니다. 사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 하는 것은 이 전부를 믿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신경을 보게 되면 결국 예수님에 대한 이 신앙고백이에요.

 

다시 한번 사도신경을 해볼가요. 사도신경을 펴보시면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에게 나시고' 이것은 뭡니까? 예수님의 탄생

그다음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것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고난 받으심.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의 죽음.

 

이 3단계를 우리가 지난주에 예수님의 낮아지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예수님의 탄생, 지상에서의 고난받으심, 그리고 십자가에 고난 받으심으로 3단계로 낮아지셨다가, 그 다음에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러니깐 우리 신앙 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그예수님이 다시 부활 하시고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다시 심판하시러 오실 것이다 하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 전체를 믿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때는 낮아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생각들을 많이 해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성탄절이란 절기를 지킬 때에 그 때마다 예수님의 성육신 탄생에 대해서 많이 생각들을 하죠. 또 우리가 십자가를 늘 성 금요일날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도 생각들을 많이 해요. 그런데 그래서 예수님은 아기 예수님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 까지는 우리가 많이 묵상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높아지신 일에 대해서는 잘 생각들을 하지 않아요. 에수님이 부활 하시고 승천하시고 지금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일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생각은 거의 정지되어있어요. 그러니깐 우리 신앙이 너무 부분적이고 파편적이에요.

 

사실은 오늘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낮아지셨을 때에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받으신 일 뿐만이 아니라 지금 영광중에 계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교제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화롭게 만드실 것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우리의 신앙이 활발해 질 것이고 더욱더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인데 이런 부분에 대한 필름이 끊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늘 예수님의 이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만 생각하니깐 사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탄생하시고 죽으셨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 보려고 합니다.

 

-- 본론1.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1단계_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어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이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니깐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처음 일어난 일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는 많이 있었어요. 구약시대때도 엘리야가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예수님께서도 3년 동안 공생애를 하시는 기간 동안에 여러차례에 죽은 사람을 살린 적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린적이 있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높아지신 부활 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가 죽은 이후에 다시 깨어나서 다시 소생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인류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이에요.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죽기 이전에 그 몸보다 월등하게 높아진 그와같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에요. 그것을 부활이라 부르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최초에 만드셨을때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기 전에는 지금 현재 우리 보다는 훨씬더 아름다운 몸 건강한 몸 복된 몸 그런 몸을 가졌겠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것은 최초의 죄 짓기 이전에 아담이 가졌던 그 몸보다도 월등하게 더 높아진 월등하게 더 영광스러운 그런 몸으로 다시 부활 하신 것이에요. 그 새로운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부활 하신 예수님의 몸을 보게 되면 최초의 에덴 동산에서 죄짓기 전에 아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진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그 부활 하신 몸은 쉽게 말하면 더이상 죄를 지을 수 조차도 없는 그런 몸으로 더이상 아플수 조차도 죽을 수 조차도 없는 그와 같은 몸으로 예수님께서 영생 불사의 몸으로 그렇게 일어나신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 부활은 장차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한 일이 최초로 이땅가운데 발생한 일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새시대에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새시대에 출발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 백성들을 영생을 주어서 살게 하실 그러한 삶에 최초의 모델 케이스가 최초의 씨앗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때에 발생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발생한 영생의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그런 몸으로 다시 일어나신 것이다. 그래서 에수님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 부활은 승리하신 사건이에요. 무엇을 승리하셨는가 하니깐, 죄로 인해서 사람들이 죽고 사단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었던 이런 모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원수들을 예수님께서 패배시키고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승리의 날이 바로 부활절이에요.

 

마치 우리가 1945년 8월 15일날 일본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종노릇 받고 있다가 이제는 해방된 날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은 어떤 날인가 하면 인류가 아담에 죄를 인해서 죽음에 종이 되었던 죄의 종이 되었던 사단의 종이 되었던 이런 상태에서 죽음도 이기고 죄도 이기고 사단도 이기고 모든 하나님나라의 원수들을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이기고 승리하신 날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원수들은 예수님이 승리하신 이 결정적인 승리의 날에 완전히 패배한 것이에요.

 

이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아직도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죄를 이기셨다는것이 실감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지은 죄값으로 죽을 운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사단이 활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많은 죄와 악이 이 땅에 있어요. 비 진리가 거짓이 이땅에 있어요. 불의한 일들이 잘못된 일들이 나쁜 일들이 아직도 이세상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과연 예수님께서 이런 죄와 이런 죽음과 이런 사단을 이길 수 있다고 하는 부활에 대해서 그렇게 피부에 와닿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기셨어요. 승리하셨어요. 그래서 더이상 죄와 죽음과 사단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장차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이기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죄를 짓고 죽고 이렇게 나쁜일들이 생기는 것들은 사실은 이미 승리하신 일에 대해서 남아있는 패잔병에 불과한 것이에요. 패잔병에 불과해요.

 

무엇과 같은 것인가 하면, 우리가 권투시합을 하는데 이제 권투시합을 옛날 많이 봤엇죠. 한사람이 결정적인 어퍼컷을 날려서 강펀치로 상대방 선수를 때렸어요. 그래서 상대방 선수가 기절할 정도로 다운 됬어요. 그리고 다시금 힘을 얻어서 조금 일어났는데 일어나가지고 비실비실 하면서 걸음을 옮기긴 옮겨요. 그런데 아직 게임 끈나진 않았어요. 게임이 끈나진 않았지만 이미 한 선수가 결정타를 얻어맞아가지고 지금 비실비실 있기 때문에 이것은 보나마나 이미 게임은 끈난거나 마찬가지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이세상에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온갖 안좋은 일들이 온갖 범죄들이 온갖 나쁜일들이 늘 신문지 상에서 뉴스에서 그렇게 들려오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런 것들이 강한 것 같아도 이미 예수님 께서 돌아가신 그날에 이 모든 적들을 이 모든 원수들을 결정타를 먹여 버렸어요. 더이상 힘쓰지 못할 정도록 그렇게 결정타를 날렸기 때문에 시간 문제에요. 이 세상에 죄가 사라지고 죽음이 사라지고 마귀과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 문제에요. 시간만 남았을 뿐이에요. 언제까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때까지 시간만 남아있을 뿐이 그 세력들이 우리를 왕처럼 다스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났는가 하니깐 예수님께서 일어나신 승리의날 부활의 날에 결정적으로 사망에 권세를 이기신 일이 죽음의 권세와 죄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날을 승리의 날이라 그렇게 부르는 것이에요. 승리의 날이다. 이미 일어났어요.

 

또 다르게 비유하자고 하면, 이렇게 해볼 수도 있겠죠. 대통령 선거를 하는 사람들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여요 그래서 개표를 해본 결과 이제 A라는 후보가 표를 더 많이 얻어서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이 되었어요. 그러면 이미 선거는 끈난 것이에요. 게임은 끈난 것이에요. 선거 전쟁은 끈난 것이에요. 아직 대통령 취임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 취임식만을 남겨 놓고 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이미 개표가 끈났기 때문에 이후에 승리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이 선거는 끈났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땅에오셔서 부활 하신 그 사건이 얼마나 위대한 거인가 하니깐, 개표가 끈났어요.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사이에 예수님과 사단 사이에 영적인 전투가 끝이 났어요. 예수님의 승리로 판명이 났어요. 예수님이 부활 하심으로 더이상 죄와 죽음과 마귀는 우리의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판명이 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왕이라는 사실이 온천하에 공포가 된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에요.

 

놀랍죠. 그래서 이런 사건이 이미 역사 가운데 승리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에요. 그래서 안식일날 예배드리는 날을 구약시대 토요일 부터 주일날로 옮기게 된 것이에요. 주일날은 한 주간의 첫날이에요. 그러나 토요일 안식일은 한주간의 마지막 날이에요. 왜 구약시대때는 안식일을 토요일날 지켰는가 하니깐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것을 바로 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이 역사의 끝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안식을 줄날을 늘 기다리고 바라봤던 것이에요. 그래서 이 안식의 날은 한주간에 끝에 그렇게 배치가 되었었어요.

 

그런데 이 역사의 끝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드디어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그런 죄 죽음 사단 이 모든 악의 세력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를 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이지.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의 아침에 이 모든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신 것을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신약시대에 안식일의 예배는 한주간의 첫날인 바로 오늘이 한주일의 첫날이에요. 바로 이날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 바로 오늘 주일 날이에요.

 

우리 신자들은 한주간의 첫날에 승리하신 예수님을 다시금 돌아 보면서 그 예수님의 승리를 기초로 해서 한주간을 예수님의 승전가를 부르면서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예배의 날을 한주간에 첫날로 옮긴 것이에요. 그날이 바로 오늘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높아지신 이사건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에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다 하는 것을 알 수 가 있어요.

 

예수님의 이 부활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 가 하면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그렇게 해줄 수가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 수가 있게 되었어요. 그걸 중생이라고 불러요. 우리가 중생할 수가 있게 된 것이에요. 그리고 장차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 해서 영화를 입게 되게 된 것이에요. 이 모든 일이 다 예수님 부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예수님이 부활이 없었더라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죽음이 우리에게 적용될 수가 없을 것이에요. 예수님이 부활 하심으로서 그 죽음의 모든 혜택을 우리에게 적용 시켜 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게 된 것이에요.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서.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게 된 것이에요. 예수님 부활이 아니라면 우리의 영혼이 거듭날 수가 없어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부활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 예수님 부활 처럼 우리의 몸도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화되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에요.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로 인류의 역사가 터닝 포인트가 생기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적으로도 이제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살 수 있고 중생한 사람으로 살 수 있고, 장차 우리가 부활 할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예수님의 첫번째 높아지심인 부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면서 에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 부활이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적용을 해야 우리가 이땅을 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이에요. 지금 우리가 이 우리 마음속에 죄와 의가 우리안에서 그렇게 서로 다투고있겠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만들고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어기게 만드는 이런 전투 가운데 우리가 죄로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있는 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은 바로 부활한 에수님의 능력이 우리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그 부활 하신 주님과 우리가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하다 하는 것이에요.

 

뿐만아니라 이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죄를 지을 수도 없는 그런 상태로 바뀔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의 그 부활이 우리 부활의 모델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부활 할 것에 대한 보증 수표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장차 우리가 그렇게 변화 될 것을 기대하며 살아 갈 수가 있게 되었다 하는 것이죠.

 

 -- 본론2.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2단계_ 승천

 

예수님의 부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그다음에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그다음단계로 들어가는데 뭘하셨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어요. 이것을 승천 하늘로 올라가다라는 말인데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는 하늘이라는 말을 한 3종류의 의미로 써요.

 

'공중의 하늘 나는 새를 보라' 이렇게 말할 때는 지금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대기권 하늘, 공중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럴때도 하늘이라고 말해요. 그건 바로 눈에 보이는 푸른 빛이 감도는 그런 대기권 오늘날로 말하면 그러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성경에서 하늘을 가리키는 때는 대기권 보다 월등히 높은 이 하늘의 별들이 걸려 있는 이런 우주공간 전체를 하늘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에요. 이럴때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이렇게 말할 때에는 단순한 이런 구름 떠다니는 이런 하늘이 아니고 더 멀리 있는 별들이 걸려있는 그런 우주 공간 전체를 하늘이라 부르기도 하는 겁니다.

 

3번째 하늘을 부를 때는 이런 내용이 아니고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때에 그하늘은 여기에 구름다니는 공중이나 별들이 걸려있는 우주 창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거기에는 천사들이 있고, 먼저 죽은 신자들의 영혼이 지금 머물러 있는 그곳을 성경은 하늘이라 그렇게 불러요. 그래서 하늘도 급수가 있죠.

 

성경적인 표현은 하늘에 급수가 있었어요. 단계가 있었어요. 제일 낮은 단계가 뭐였죠. 공중, 두번째가 우주공간 그리고 세번째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사 할때는 뭘 말하는 걸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비행기 타고 다녀봐도 예수님이 안계신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오해하는 것이지요. 뭐를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눈에 보이는 대기권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우리 사람의 힘으로는 2번째 하늘 까지도 다 뒤져볼수가 없겠죠. 그 어마어마한 공간을 뒤져 볼 수가 없겠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사 할 때는 물론 첫번째 하늘을 통과해서 두번째 하늘을 통과해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우주가 아니라 물리적인 우주가 아닌 영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세계로 들어가셨다. 하는 표현이에요. 원래 예수님께서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 가신 것이에요. 예수님이 이땅에 마리아를 통해서 인간이 되시기 전에 계셨던 그곳으로 예수님이 다시 돌아가신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평상시에 늘 이런 말씀을 했어요. 아버지께로 내가 왔는데 이제 다시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때로 말하면서 예수님이 가신 그곳은 다른 표현으로 하늘이라고도 말하고, 때로는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낙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이렇게 사도바울 같은 이는 그래서 자기가 한번 거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갔다온적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하늘을 뭐라고 불렀죠? 삼층천 이라고 불렀어요.

 

삼층천. 1층 2층 3층이라고 말하면 세번째 하늘이라는 말이 삼층천을 갔다 왔다. 이런 말인데 그 삼층천은 이런 물리적인 세계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지금 거하고 계시는 그 영적인 세계 거기로 예수님께서 올라 가셨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셨다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원래 그곳에 계셨는데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올라가실 때는 좀 차이가 생겼어요. 어떤 차이가 생겼죠. 원래 예수님이 처음 계실때에는 어떤 상태로만 계셨어요? 신성으로서만 하나님으로서만 그 하늘에 계시다가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했을때에는 다른 조건으로 들어가셨어요. 어떻게? 완전한 인간의 인성도 함께 가진 상태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니깐 원래 있던 상태와는 다른 상태로 그렇게 하늘로 올라 가신 것이에요.

 

이것이 왜 중요한 가 하니깐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늘로 승천하신 것은 단순히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과 연합되어있는 예수님과 하나되어있는 우리 신자들도 바로 그 하늘로 데리고 가신다고 하는 뭐가 될까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대표가 되시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승천또한 뭘 대표하는 것일 까요? 우리가 장차 하늘로 들어갈것에 대한 그러한 대표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장차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그 보증 수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어디에다 두라구요?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시는 그위에 우리의 마음을 두라!! 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영적으로는 거기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민권은 즉 이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들어가 계시는 그 하늘 시민권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하늘로 올라 가셨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임무를 다 완수했어요.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다 완수가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임무를 다 끝내시고 복귀 하신 것이에요. 다시금 아버지께로 복귀 하시면서 그 이야기는 지상에서 사역이 다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아직도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더 할 필요가 있다가 그러면 승천하시지 않았을 것이에요. 여전히 이땅에서 자신의 사역을 했을 것이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승천했단 얘기는 더이상 지상에서의 사역이 남아있지 않다.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승천하신 목적이 있어요.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 앉으시기 위해 가신 것이에요. 그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일은 조금 있다가 설명을 드리겠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중요한 또다른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무슨 말씀이시죠? 우리가 영원히 살집을 뭐하러 가셨다고요? 준비하러 가셨어요. 예수님 께서 내가 가야 너희를 위한 거처를 준비 했다가 너희를 위한 거처가 다 완료되면 내가 다시와서 그곳에 너희를 데리고 가리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집없는 서러움이 크죠. 그래서 1년이 지나면 또 전세값 올려달라 또 허리 휘고 또 자기 돈 맞는 곳으로 옮기려고 하면 점점 교회로부터 멀리 멀리 멀리 그렇게 떠나는 아픔을 그렇게 겪는 우리 신혼 부부들 계시잖아요.

 

지상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고달프게 살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그조차도 없었어요.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듯이 지상에서는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었어요. 우리는 예수님 보다는 낳아요. 머리 둘 곳은 있으니깐, 좀 교회에서 멀리 떨어졌을 뿐이지 머리 둘곳은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무슨 소망을 주셨는가 하니깐, 우리가 이땅에 사는 그 아파트와 이땅에 사는 그 단독 주택이 우리의 영원히 사는 집이 아니라는 것을 승천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에요. 만일 예수님 이 지상에서 사는 집이 그의 영원한 집이라면 이땅에서 그의 거처를 마련했겠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느니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는 너희에게 이 거처를 예비 하기 위해서 다시 올 것이다. 약속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집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이집이 아니라 여기는 잠시 머무는 여관숙, 여인숙 같은 곳이고, 영원한 주님이 승천하셔서 예비하신 그집이 우리의 영원한 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요. 우리의 눈과 우리의 생각을 그 영원한 집에다가 초점을 맞춰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옛날 아브라함은 이런 삶의 비밀을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줄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사실 자기가 들어온 이 가나안 땅이 영원히 살집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기가 이 가나안 땅을 영원한 땅이 아니란걸 알고 하나님이 장차 자기에게 줄 영원한 본향 영원한 고향집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았던 그 가나안 땅에서 땅 넓힐 생각을 안했어요. 하지 않고 나는 딱하나 얻었는데 어느정도 얻었죠? 자기가 죽었을때 자기 몸 눕힐 무덤하나 만들 땅만을 확보한채 이땅을 떠났던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겠다고 했던 그땅이 지금 바로 저 팔레스타인 땅인데 그땅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승천하신 그 하늘에 영원한 집을 주신 다는 것을 아브라함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소망을 지상의 땅에 두지 않고 영원한 본향에다가 두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상에 살면서 아파트 평수를 좀 많이 넓게 살고 계신 분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이 넓게 살라고 했을까요? 손님 초대 많이 하라고 성도들 많이 초대해서 많이 먹이라고 하는거니깐 좀 넓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좁을때는 초청할 수 없잖아요. 넓을 때는 성도들을 많이 초청해서 많이 먹이도록 집이 넓으면 냉장고도 넓을 거니깐 거기서 많이 먹이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고, 또 집이 좁게 살도록 하신 것은 왜그럴까요? 여기가 영원한 집이 아니니깐 조금만 참으라는 인내를 가르켜 주는 것이니깐, 인내를 보여 주는 것이에요. 그렇지 날마다 냉장고 열면 여기가 영원한 집이라면 내가 한숨나오겠지만 영원한집 아니지 아니야 하면서 그렇게 날마다 확인 하면서 영원한 집을 향해서 우리가 소망을 가지도록 잠시 그렇게 그런 좋은 집에 살도록 한 것이니깐, 뭐 우린 불평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좀 집을 넓은데 살게 하신 것은 손님 좀 많이 불러다가 먹이고, 좀 좁은집에 살게 하시면 이를 악물면서 인내를 배우고 그러면 되는 것이죠.

 

왜냐?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세상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눈으로 증거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이유는 이제 하늘에 올라가서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에요. 내가 떠나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늘로 가셨다고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것인 것처럼 예수님의 승천도 사실은 우리의 것이에요. 왜그렇죠? 예수님 믿는 순간에 우리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앉아 계신 그곳도 장차 우리가 앉을 곳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내가 가서 나혼자만 영원히 살곳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하고 영원히 함께 살 곳으로 내가 먼저가서 너희하고 영원히 살집을 내가 마련할 것이고,다 마련하면 와서 너희와 영원히 살것이다. 그랬으니깐, 예수님께서 가신 그곳이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마음을 거기에 둬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지상에서 3년 반동안 머리 둘곳이 없이 사셨을때에 늘 예수님의 마음이 이곳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기한이 차더니 승천하실 것을 아시고 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예루살렘에 가셔서 고난을 받으실 것을 결심을 하셨다. 라고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하죠. 예수님의 마음속에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푸른 하늘만 바라보지 말고 푸른 하늘보다 조금더 봐야 하는 것이에요. 어디까지? 넓은 우주공간을 봐야 하고, 우주공간 보다 좀 더 높이 봐야 하는 것이에요. 어디를? 하늘에 올라가신 그리스도를 봐야한다. 하는 것입니다.

 

--본론3.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3단계_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는 어디로 올라가시기 위한 것이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시기 위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높아지심의 3단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좀 구별해야 해요. 왜 구별해야 하는가 하니깐, 달라요. 승천해서 목적지가 어디에요? 하나님 보좌 우편이니깐 서로 구별해야 하는 것이에요. 또 중요한 사실은 무엇인가 하니깐, 승천은 딱 한번 일어난 일이지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은 영원히 거기서 앉아 계신 것이니깐 차이가 나는 것이에요. 또 승천한 존재가 또 있어요. 예를 들면 옛날에 엘리야도 올라가고, 에녹도 올라가고, 장차 누구도 올라가요? 또 신앙생활 하다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도 예수님 계신 곳으로 올라가요. 이렇게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은 많아요. 많은데 하늘로 올라간다고 해서 승천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 예수님의 승천과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은 구별해야 하는 것이에요.

 

예수님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 가신 것이지,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죽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간다는 그런 표현이 성경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일은 예수님에게만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일인데 무엇때문에? 그를 지극히 높히신 것이에요. 그를 지극히 높히신다는 말이 그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물리적인 이런 의미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다는 표현 자체가 이런 문자적인 표현이 아니에요. 상징적인 표현이지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많은데 그 하나님께서 육체가 있으셔야 보좌에 앉으시죠. 하나님이 영이시니깐 육체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계신다는 말은 문자적인 표현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이에요.

 

예를 들어서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을 부를때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니 그런 표현도 문자적인 표현이 아니고 뭐죠? 시적인 상징적인 표현이듯이,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다는 표현도 상징적인 표현이에요.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이 보좌 우편에 앉으신다는 얘기는 무엇을 말하는 가 하니깐, 우편이라는 자리가 중요한 자리에요. 그래서 고대의 왕들이 그나라에 가장 명예롭게 권위있게 자리를 부여할 사람들을 자기 우편에 앉히는 것이에요. 보통 옛날에 왕들이 그 오른편에 누구를 앉힐까요? 자기 황태자를 앉히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편에 앉히신다는 얘기는 영광, 권위, 존귀, 이런것들을 주신다. 그런뜻이에요. 그리고 사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다는 얘기는 이제 지상에서의 모든 통치권을 그의 아들에게 다 맡기신다 하는 그런 표현과 같은 것이에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이제는 아들에게 주어서 아들로 하여금 이땅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이땅을 구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정권을 맡기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은 더 높아지신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그에게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빌립보서에서는 하늘에 있는자들과 땅아래있는 모든 자들이 그의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하여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에게도 영광을 돌리도록 해주신 것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 사건이었다.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승천하신 것은 언제 일어난 일이었습니까? 언제 일어난 일이죠?

지금 부터 거의 2천년전에 죽으셨다가 부활 하시고 부활 하신 다음에 몇일째 만에 승천했다고 하죠? 성경은 40일 이후에 승천했다고 그러니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거의 기간이 약 40일정도 차이가 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과거의 일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일은 언제 일일까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는 일이고 언제까지 계속될 일이에요?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아까 말한 것처럼 어차피 하나님 보좌 우편도 어디에 있는 곳일까요? 하늘에 있는 곳인데 왜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다고 표현하고 있다구요? 성부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정권을 전부다 예수님께 맡기셨다고 하는 그런 표현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예배도 찬양도 경배도 기도도 성부하나님과 동일하게 받으실 합당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표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성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만 성자 예수님께 기도한다고 틀린 것은 아니에요. 이제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동일하게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자리에 합당하게 그렇게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릴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찬양과 경배를 동시에 돌리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러면 지금 하나님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하고 계신 일이 뭘까요?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공부할 때 예수님은 선지자 이시고 제사장이시고 또 왕이신데 지금 그일을 다 하고 계신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선지자로서도 사역하고 계시고 또 제사장으로서도 사역하고 계시고 또 왕으로서도 일하고 계세요. 언제? 지금 이순간에,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바로 이현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그렇게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사역을 하고 계신다. 언제요? 지금.

 

예수님께서 선지자로서 사역하신 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것을 가리킨다고 했어요? 누구를 보내신 일이죠? 성령님을 보내어서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게 하고 이해하게 하고 성경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적용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이에요. 만일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들을 때에 목사님의 설교가 오늘 깨달아진다. 똑같은 얘기를 지난주에 했을때는 못깨달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것이 이해가 된다. 하면 제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머리가 좋아서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예수믿는 사람들이 머리 다좋은 거 아니잖아요. 아이큐 테스트 해보면 예수믿는 사람들이 한 800만이 되면 한 5천만 중에 800백만등까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고 800백만 1등부터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다. 이건 아니잖아요. 근데 어떻게 우리는 성경을 읽었는데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이런 구원의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감격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걸 까요? 예수님께서 선지자로서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서 각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이해 시키고 깨닫게 해주고 받아들이고 하기 때문에 그런일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깨닫게 되면 성경을 읽을때라든지 설교를 들을 때라든지 혹은 좋은 신앙 서적을 읽을때 우리가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 가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요? 아니 제가 설교 했는데 제설교를 듣고 깨달았으면 누구한테 감사해야 되겠죠? 아니 제가 설교 했잖아요. 먼저 저한테 감사를 표해야 되겠죠. 잘 설명해 주어서. 그러나 거기에 멈추면 안되겠죠. 이렇게 설교할 수 있도록 깨닫도록 해주신 분이 성령님 이시니깐 누구한테 감사드려야 되겠어요? 성령님께 감사를 드려야죠.

 

그런데 성령님께 드리는 감사 이상의 감사를 드려야 되겠죠. 누구에게? 그렇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분이 누구에요? 예수님이시니깐, 결국은 우리가 말씀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도 감사해야 할 일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가운데에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이와같이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들을 통해서 하시고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에 지금 사실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런 사역자들과 성령님을 동시에 사용해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주고 계신다. 하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희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과 재림을 증거 했는데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제말을 믿은 것이 아니에요. 누굴 믿은것인가 하니깐 저를 보내어서 여러분들에게 이 진리를 증거하게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것이에요. 만일 여러분이 이자리에서 제가 증거한 이런 우리가 앞으로 승천한 것이 어디있어?!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 어떻게 믿을수 있어?! 이렇게 제가 전한 이말을 거절하면 제말을 거절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 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거절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사역자들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신다.

 

두번째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서 사역하신 일은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신다는 뜻일까요?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한다는 것인데, 그게 무슨 뜻인가 하니깐,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모든 속죄의 사역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제가 이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지 않았습니까? 이사람의 죄값을 제가 대신 다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영원히 한번에 다 드리신 그 십자가에 죽음에 공로를 기초해서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믿다가도 죄를 짓게 되죠. 여러분이 죄를 짓게 되면 여러분을 위한 변호사가 되세요. 이세상에서도 죄를 짓게 되면 변호사를 고용해야 되잖아요. 여러분이 큰죄를 지으면 돈많이 주고 변호사를 고용해가지고 또 질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바로 예수믿는 여러분의 변호사로서 계신느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를 지으면 여러분이 지은 그 죄는 하나님께 징벌 받아 마땅한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해서 하나님아버지께 어떻게 변호하시는것인가 하니깐, 아버지 비록 저사람이 죄를 지었지만 내가 저 지은 죄값을 대신해서 이미 다 죄값을 치루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때문에 이사람 나를 믿는 이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기가 우리 죄값을 다 지불 하신 것을 기초로 하나님께 변호하시기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보면은 진노할 수 밖에 없지만은 우리 대신에 죄값을 지불하고 우리의 변호사로 계시는 예수님을 딱 오른쪽만 보면 아버지는 우리를 벌 줄 수가 없어요. 왜그런가 하니깐 우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 바로 변호사가 계시기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이 죄를 지었을때에 눈물 콧물 흘린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나 어제 죄짓고 눈물 한바가지 흘렸다. 물론 속은 시원하겠죠. 많이 눈물 흘렸으니깐, 속은 상쾌 하겠지만, 그 눈물많이 흘렸다고 죄용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때문에 이미 2천년전에 여러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그사실을 늘 하나님께 상기 시켜 드리면서 우리의 죄값이 다 끈났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 드리면서 우리의 죄가 용서 되었음을 확인하고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죄가 늘 또다시 새로워 지고 또 새로워지고 새로워지면서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일을 지금 하고 계세요. 그것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신다. 그런거에요. 그래서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신학적으로는. 왜냐하면 하나님앞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기도를 드릴수 있는 분은 상천하지에 한분밖에 안계세요. 예수님밖에 안계세요.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공로를 가지고 우리의 죄문제를 하나님께 탄원 할 수 있는 분은 중보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안계시고 우리는 그냥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냥 기도하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보고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깐 우리의 다른사람을 위한 기도가 중보기도는 아니에요. 그러니깐 사실 용어를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한다 이런말을 써서는 안되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그냥 지금 용어가 다른사람을 위한 기도를 합시다.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립시다 이런말을 쓰는 것인데 사실 통용이 너무 많이 됬으니깐 일일히 검사할 수 도 없고, 지금 그럴수 없는 형편이지만 그것이 옳은 말은 아니다. 왜 옳은 말이 아니냐..? 이 우주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중보할 자격이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도 응답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나는 저사람을 위해서 한시간 기도했어. 이거 자랑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요.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랬을 뿐이에요. 우리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주님이 그기도를 응답했을지라도 그기도의 응답도 예수님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시는 그 공로로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이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시간씩 그리 했다고 그게 다이렉트로 효과를 발휘하는게 아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자. 천만에 말씀. 기도하라 하셨으니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 기도에 대한 모든 응답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 하시는 그 중보사역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이는 못사는 것이에요.

한순간도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선지자, 제사장만이 아니라, 무슨 역할을 하고 계신다구요? 우리의 왕으로서 또 온세상의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세요. 그래서 제가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만일 예수님의 왕되심에 순종하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 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왕되심을 적어도 인정하고 우리가 부족하기때문에 제대로 순종을 못해서 문제이지 적어도 예수님이 왕이란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불신자들은 아무리 예수님의 왕되심 자체를 부정을 하고 불순종하는 것이니깐, 우리가 예수님말씀에 불순종 한 것과는 차이가 다르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점이 있다면 그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은 교회의 왕일 뿐 아니라 지금 이세상을 다스리고 계세요. 그래서 요한 계시록을 보게 되면 일곱인을 누가 떼는가 하니깐, 예수님이 떼고 있어요. 그 일곱인을 뗄때마다 지상에서는 전쟁과 전염병과 온갖 것들이 재난이 발생하는데 그걸 누가 통재하시는 가 하니깐 예수님이 통재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때는 북한의 핵개발이 사실은 그 북한의 책임자인 김정일씨가 가지고 있는 거 같죠.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가 가지고 있겠죠. 그러나 그 핵이 개발되가지고 터뜨리느냐 마느냐 이런것은 예수님의 통제권 속에 있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러면 터뜨려야 할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터뜨리지 않을 것이에요. 아무리 100만개를 만들었다할지라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 에수믿는 사람들은 이세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 또한 왕되신 주님의 허락 없이는 되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그 일때문에 놀랄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과정속에 있기 때문에 주님이 허락한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이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만일 예수님이 우리 교회의 왕만 되시고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면 예수님 통제권은 우리 교회밖에 안미치고 지금 이세상에서 악인들이 날뛰는 통제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악인들이 우리를 핍박하거나 교회를 말살하려고 할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교회를 보호하시겠어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떨어지는 참새 한마리 까지도 다 통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상속에 교회를 보존하시고 확장시키고 교회를 완성하실 때에 모든 세상 만물까지도 예수님은 지금 왕으로서 통제 하고 계신다.

 

이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세상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날때 우리마음이 불안해 하거나 염려하거나 하는 것은 다시 예수님이 온세상의 왕이란 사실을 믿지 않으면 늘 염려에 빠질 수 밖에 없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의 왕이시고 우리 교회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께서 이세상을 지금도 운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신뢰 할 수 있기 때문에 세상이 바닷물이 요동할 지라도 산이 무너질찌라도 어떤 난리가 벌어질지라도 이세상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밖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이땅은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 그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에요.

 

--본론4.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4단계_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서 하실 뿐 아니라 마지막 예수님의 높아지심의 단계는 뭐하시는 거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러 다시 오실 때에 예수님의 영광은 극에 달할 것이에요. 그때에 모든 눈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다 보게 될 것이에요. 모든 신자들도 예수님을 다 보게 될 것이고 불신자들도 불신자들 차원에서 예수님의 공의로우심과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그날은 다 알 수가 있게 될 것이에요. 그날은 예수님이 온천하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분의 영광과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내시는 날이 되게 될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때에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러 온다 했는데 이때 산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 재림할때 그당시에 살아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죽은자를 가리킬때는 예수님 재림하기 직전에 죽은 자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그러니간 예수님의 재림때 심판을 피할자는 없어요. 죽었던지 그당시 살았던지 간에 다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때 살아있는 자들이야 예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치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몇천년전에 몇백년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럼 심판을 받는 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그때에 모든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될 거라 그랬죠/? 다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어요. 신자이던지 불신자 이던지 죽었던 모든 사람들도 다 부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산자와 죽은자 모두가 예수님 앞에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님 심판을 받게 되면 심판 받는 모든 사람들이 둘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에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한편으로 서게 될 것이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한 자들은 또다른 편에 서게 될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자신의 왕으로 자신의 선지자로 자신의 제사장으로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그렇게 살아갔던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그 심판의 날이 최상의 좋은 날이 될 것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는 영원히 새하늘과 새땅을 상속하라고 그날 우리에게 최종적인 상급을 주실 것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아니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최고로 나쁜날이 될 것이에요.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을 받고서 영원한 불못으로서 영원히 떨어져서 영원히 심판받는 일이 시작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이 오기전까지는 그 차이가 별로 많은것 같지가 않아요. 별로 그렇게 차이가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치 이런 비유를 들어주었어요. 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알곡도 자라는 데 가라지가 함께 자라요. 근데 그 알곡과 가라지가 완전히 열매를 맺게 되면은 처음 봐가지곤 잘 몰라요. 농사를 안짓는 사람들이 보게 되면 뭐가 알곡인지 뭐가 가리지인지를 잘 몰라요. 이게 함께 자라고 있어요. 같은 밭에 자라고 있으니깐, 별로 그 차이를 알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차이는 언제 일어나는 가 하니깐, 추수때 일어나는 것이에요. 추수할 때 알곡은 거두어서 곳간에 들여지는 것이고, 모든 쭉정이를 비롯한 모든 가라지들은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이에요.

 

그 추수때는 종말때는 확연하게  둘로 구분하는 일이 있을 것이에요. 지금은 이세상에 이렇게 주일날 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예배드리러 온 우리나 지금 저 하늘공원으로 호수공원으로 천지 공원으로 다니면서 그렇게 다니는 예수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나 지금 우리눈에는 차이가 크게 안보여요. 별로 크게 보이지 않아요. 단지 우리는 이곳에서 한 2시간 예배를 드리고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과일 먹으면서 뭐 자전거 타고 놀고 있으니깐 별로 차이가 보이지 않고, 어찌보면 그사람들이 더 부러워 보여요. 만일 우리가 눈을 들어서 이 주변에 천지공원 하늘 공원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굉장히 부러워요.

그럴수도 있어요. 지금 우리눈에는. 차이가 별로 안나니깐, 그래서 지금 우리가 뭐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차이를 언제 만드시는 가 하니깐, 주님이 오신 재림때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금 바다에 고기가 막섞였을 때는 무엇이 좋은 고기인지 나쁜 고기인지 구별이 안되요. 그런데 그물로다가 고기를 떠서 뭇으로 끌어올려서 좋은 고기와 나쁜고기를 갈라 낼때는 그 고기의 질이 완전하게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주님이 오시는 그날은 심판의 날이에요. 그날은 산자와 죽은자 모두가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주님앞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에요. 그런데 신자들이 받는 심판은 지옥가는 심판이 아니라 그 때 심판을 받고 의롭다고 선언을 받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제 내 나라를 너도 함께 누려라 하고 영원한 새땅과 새하늘을 우리들에게 유업으로 주시는 것이에요. 심판을 하지만 그 심판의 내용에 정죄가 없어요. 지옥가는 정죄가 없고, 오히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는 상급을 받게 될 것이에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주님오시는 그 심판의 날이 정죄를 받는 날이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너의 죄값을 지고 영원히 심판을 받으라 해서 불못으로 들어가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에요.

 

 우리 학생들도 마찬가지죠. 평상시 공부할때는 놀러가나 공부하나 별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노는 애가 좋은거 같아요. 맨날 게임하고 놀러 댕기고 근데 공부 열심히 하는 애는 그렇게 게임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하니깐 잘 차이가 안나지만 딱 시험 봐가지고 성적을 딱 공개 할때는 그 때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대학때 점심 먹고 다 공부하는 것 같지만 언제 드러나는 것인가 하니깐, 오늘 드러나는 것이에요. 오늘.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갈때 차이가 없는 거 같지만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차이가 다 있는데 아직 공개되지 않았을뿐.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는 우리가 이땅에 살았던 모든 삶이 공개가 될 것이고 그리고 그에 따라 주께서 상급 내리시거나 징벌하시는 일들이 있게 될 것인데 이일을 위해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런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죄 없는 아이가 이렇게 질병에 걸리고 왜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이렇게 나쁜사람은 그렇제 잡히지도 않고 피래미만 다걸리고 둔치들은 다 빠져 나가고 왜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가 있어요. 왜 저는 신앙생활을 잘하는데 저에게는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십니까? 또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주님이 오시는 그 심판의 날에 그런 모든 불평들이 입을 닿게 될 것이에요. 주님은 공의롭게 죄인은죄값으로 반드시 값을 것이고, 우리가 주를 위해서 헌신 한 것은 헌신한 값대로 다 값을 것이니깐, 그 때에는 주님의 공의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에누리도 없이 완전히 공평하게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하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의 공의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 공의 이상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 신자들에게 더욱더 크게 그렇게 드러나게 될 것이에요.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우리가 한 주제 한주제를 사실은 한주에 해도 분량이 다 모자랄 것인데 지금 빨리 하느라고 지금 우리가 세부적으로 살펴보지를 못햇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한가지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깐, 예수님의 이런 높아지심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동시에 장차 무엇에 대한 도전일까요?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이 앞으로 되어질 것에 대한 모델이자 앞으로 그렇게 될 것에 대한 보증 수표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우리가 따로따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죽으심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승천이 에수님의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 예수님의 재림이 그 모두가 다 장차 우리가 그렇게 되어질 일을 예수님께서 개척자로서 먼저 가신 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처럼 우리도 어떻게 될 까요? 부활 하게 될 것이에요. 예수님처럼 우리도 새하늘과 새땅에서 서게 될 것이에요. 예수님처럼 우리도 예수님 보좌에 함께 앉아 통치하게 될 것이에요. 예수님처럼 우리도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 공의롭게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땅에서 영원한 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누구를 위한 낮아지심이었죠? 바로 우리를 위한 낮아지심이죠. 우리 대신에 받으신 고난이시고, 예수님의 영광은 사실 누구를 위한 영광일까요? 하나님 예수님 자신을 위한 영광이겠지만 우리들에게 적용할 때는 그 영광이 바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기위해서 우리대신에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님이 부활 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보좌 우편에 가셔서 다시 재림하신 일이기도 하시다.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재림은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누구의 이야기이기도하죠?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에요. 내가 앞으로 그렇게 되어질 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심과 재림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뚫어지게 그 부분을 묵상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것을 우리는 깊이 노래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려고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려고 그길을 앞서 가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맺음말.

 

물론 이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오늘 우리의 형편이 당장 바뀌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몸에 지금 여러가지 안좋은 질병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당장 이순간에 여러분의 몸이 지금 당장 그렇게 건강해지지 않아요. 혹시 저 기둥뒤에 있는분 신경통 증세가 있으신데 오늘 낳았습니다. 이런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높아지신 것은 지금 당장 우리에게 100프로 적용되는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부활 하시기까지 이땅에서 뭘하셨죠?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신 이후에 하나님이 그를 부활 시켰을 때에 그가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신 것과 같이 앞으로 신경통 무슨 관절염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더이상 어떤병도 어떤 죽음도 죽지 않는 그런 영생 불사의 몸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때가 있어요. 그때가 언제인가 하니깐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그때가 되면은 더이상 죄값으로 당하는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질 날이 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땅에서 좁아터진 방에서 살고 냄새나는 동네에서 살면서 힘들어 하지만 영원히 우리가 거기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은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게 영원한 우리의 현실은 아니에요. 우리의 영원한 현실은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현실이에요.

 

단지 잠깐 잠깐동안만 우리가 이땅에서 그런 현실이 아닌 현실을 살고 있는데 2개를 놓고 볼때 뭐가 진짜에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괴롭고 아프고 몸아프고 이렇게 못살고 이렇게 신경성이 많고 이렇게 괴로운 일들이 이게 우리의 진짜에요? 아니면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예수님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사는일이 우리의 진짜에요?

 

현재 우리의 모습이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물론 우리의 것이긴 하나 이건 좀 있으면 없어질 것이에요. 우리의 진짜 현실은 바로 예수님의 높아지심이 그분의 부활과 그분의 승천과 그분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과 그분의 재림이 그게 진짜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에요. 이것이 신자의 소망이에요.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의 어려운 일들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것은 잠깐 있으면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에요. 눈에 안보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그분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과 다시오시는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게 더 진짜 현실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순간에 우리의 이 낮은 세상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는것입니다. 주님의 높아지심이 바로 우리의 높아지심이될 보증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 높아지신 주님을 생각하고 그 주님이 주실 영광을 바라보면서 소망가운데 남은 여러분의 생애를 보내시기를 바라고 일주일 동안 여러분이 어떤 힘든일이 다가올지라도 그 힘든일 속에서 눈을 들어 우리가 높아지신 그리스도를 본다면 우리가 이것이 나의 현실이 아니고 조금 있으면 나에게 주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현실을 바라보고서 힘있게 소망가운데 버티며 참으며 인내하며 영광스러운 날을 기약하며 그렇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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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족간에 일이나 혹은 직장의 일이나 여러가지 문제로 고통스러워 하며 눈물흘릴수 밖에 없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시간 그런 고난의 현장속에서 예수님이 나보다 더 많이 나를 위해 이미 고난을 대신 당해주셨음을 기억하게 해 주옵소서.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의 현장속에서 눈을 들어 우리 앞서가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높아지심을 생각하게 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주님의 높아지심 때문에 우리 마음이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이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라 올수 있는 담대함을 얻을 수 있도록 주께서 복을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또다시 일주일 동안 살아갈때 사방으로 우겨쌈을 싸는 것 같이 우리의 환경이 어렵다 할지라도 도무자 싸이지않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 거꾸려 뜨림을 당할지라도 영원히 넘어짐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뚜기처럼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한주간의 삶을 다 살게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